로타리 역사
로타리의 창시자 폴 해리스
로타리는 폴 해리스라는 한 사람의 비전으로 시작되었다 — 폴 P. 해리스
해리스는 1868년 4월 19일 미국 위스콘신주 라신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버몬트주의 윌링포드로 이주하여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버몬트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1년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1896년 해리스는 시카고에 정착하여 변호사 개업을 했다. 4년 후 그는 시카고의 노스사이드에서 동료 변호사 밥 프랭크(Bob Frank)를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그들은 근처를 거닐며 몇몇 상점을 들렸다. 해리스는 가게 주인들과 스스럼 없던 프랭크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시카고로 온 이후로 다른 직업인들과 그러한 동료애를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월링포드에서 자랄 때 느끼던 우정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이 거대한 도시에 수백 명, 아마 수천 명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농촌이나 작은 마을 출신으로 시카고에 새롭게 터전을 잡은 젊은 전문인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떨까? 나처럼 친교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해리스는 여러 지인들을 설득하여 지역의 사업가들로 구성된 친목 단체의 결성을 논의했다. 1905년 2월 23일에 폴 해리스와 구스타버스 로어, 실베스터 쉴리, 하이램 쇼리가 시카고 도심에 있는 로어의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로타리클럽의 시초였다.
1907년 2월, 해리스는 시카고 로타리클럽의 3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임기를 마칠 무렵 로타리를 시카고 너머로 확장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일부 클럽 회원들은 재정 부담 증가를 우려하여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해리스는 이를 계속 추진하여 로타리는 1910년부터 미국의 다른 주요 도시로 확대될 수 있었다.
해리스는 이사회를 갖춘 전국연합회를 결성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10년 8월, 로타리안들은 시카고에서 첫 전국대회를 열었고 기존의 16개 클럽은 로타리클럽 전국연합회(오늘날의 국제로타리)를 결성했다. 새롭게 탄생한 전국연합회는 만장일치로 해리스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로타리 회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가 끝나자 해리스는 건강문제와 직업활동, 개인 생활을 이유로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대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러한 직함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해리스는 다시 로타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외부에 로타리를 알리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원을 확대하고 봉사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아내 진(Jean)과 함께 국제대회에 참석하고 전 세계의 클럽들을 방문했다.
해리스는 오랜 병고 끝에 1947년 1월 27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려면 화환 대신 로타리재단에 기부를 해달라는 뜻을 이전부터 밝혀왔다. 마침 해리스의 사망 며칠 전 로타리의 리더들은 재단을 위한 대규모 기금모금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해리스의 사망 후 로타리는 이러한 기부를 권유하기 위해 폴 해리스 추모기금을 만들었다. 로타리안들은 기부를 통해 로타리의 창시자를 추모하고 해리스가 추구했던 대의를 위해 기금이 사용되도록 했다. 로타리재단은 130만 달러를 모금했고, 이 기금은 재단의 첫 프로그램, 즉 외국에서 유학하는 대학원생들을 지원하는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