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리 역사
세계에 평화를: 로타리의 평화 구축 역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평화 유지 결의'에서부터 로타리 평화 센터에 대한 끊임없는 지원까지, 로타리와 그 회원들은 전 세계 지역사회에서 평화를 가져오고 분쟁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우리의 영향력을 발휘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의 로타리안들은 1914년 로타리 국제대회 전에 국제 로타리클럽 연합(국제로타리)이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이 전쟁의 포화에 잠식되기 불과 몇 주 전에 열린 국제대회에서 참가한 대의원들은 이에 동의했다.
당시에는 몇몇 국가에만 존재했던, 국제적인 단체가 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되었던 신생 단체로서는 대담한 제안이었다.
로타리의 목적
세계대전의 상흔을 가슴 속에 생생하게 간직한 1921년 에딘버러 국제대회 참석자들은 로타리 정관에 "봉사의 이상으로 결합된 사업인과 전문직업인들은 세계적 우의를 통하여 국제간의 이해와 친선과 평화를 증진한다"라는 목표를 추가했다.
1922년 국제대회 참석자들은 국제로타리와 로타리클럽 정관을 수정해 각기 가지고 있던 목표에 평화에 대한 비전을 담아 '로타리의 목적'이라는 통일된 목표로 대체했다.
국제이해증진회의
로타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초기 노력 중 하나로 미국 테네시주 내쉬빌의 로타리안들은 1934년 국제이해를 장려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11일 동안 열린 공개 모임에 유명 작가와 경제학자, 과학자, 정치인, 보도 관계자 들이 모여 경제와 세계 평화, 과학 발전 등의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 프로그램은 뒤에 국제이해증진회의로 알려졌고, 1936년 국제로타리는 다른 로타리클럽도 이런 모임을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클럽들은 각 지역에서 회의를 조직했고, 로타리재단은 연사들의 초청비용을 지원했다. 그후 10년 동안 미대륙과 호주, 뉴질랜드의 965개 클럽이 수백 개의 회의를 열어 다른 나라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로타리 회원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탐구했다. 1940년 국제대회 참가자들은 '세계의 분쟁 속 로타리"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자유와 정의, 진실, 약속의 존엄함, 인권 존중이 없는 곳에는 로타리, 또는 로타리 이상의 승리 또한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국제로타리 회장이던 월터 D. 헤드는 국제적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폭력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로타리안들이 그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했다.
<더 로타리안> 지 역시 작가와 정치인, 다른 유명인 들의 글을 실어 평화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로타리는 이 글을 모아 <우리가 사는 세상>(1942)과 <평화는 과정이다>(1944)를 출판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화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를 바라며 <평화에는 실천이 필요하다>(1947) 또한 출판했다.
국제연합(UN)
1945년 UN이 출범할 때에도 로타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국제로타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UN 창립 컨퍼런스에서 미국 대표 자문단으로 모인 42개 단체 중 하나였으며, 전 세계의 많은 로타리안 및 명예 로타리안 들이 자국 대표단 대표 또는 자문으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로타리와 UN은 국제관계를 강화하고, 지역사회 및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평화 구축을 위한 지속성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계속해서 협력해왔다.
오늘날 국제로타리는 UN 경제사회이사회가 비정부기구에 부여하는 최고 수준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으며, 1991년 창립된 로타리 대표단 네트워크는 다양한 UN 단체와 프로그램, 위원회 및 기관과 이 관계를 유지 및 발전시키고 있다.
장학금
로타리의 창립자 폴 해리스는 국제 상호이해와 평화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1921년 국제대회 메시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로타리는 어떤 나라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갈등이 덜 일어나게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로타리는 개인 및 나라의 상호교류와 우정을 장려할 것이다."
해외에서의 석사학위 취득을 위한 장학금은 1947년 로타리재단의 첫 프로그램이 되었다.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 중에서 장학생을 선발해 최소 1년 해외 연수를 보낸다는 아이디어는 고등교육을 장려하고 다양한 문화와 국적의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해 폴 해리스가 작고하고, 무덤에 꽃을 바치는 대신 기부를 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로타리재단으로 기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폴 해리스 추모 기금으로 새로 만들어진 장학금 프로그램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고등교육을 위한 폴 해리스 재단 장학금'이라고 명명되어 첫해에 18명의 학자들을 지원했다. 나중에 '친선사절 장학금'으로 불렸던 이 프로그램은 지구 보조금 및 글로벌 보조금에 통합된 2013년까지 이어졌다.
평화 포럼
분쟁을 일으키는 문제들과 평화 구축 활동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기 위해, 로타리는 3년간의 파이럿 프로그램으로 평화 포럼을 시작했다. 로타리 리더들과 초대된 게스트들은 1988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서 열린 포럼에 참여해 '비정구기구와 평화 탐색' 등의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다.
1990년, 로타리재단 이사회는 이 프로그램을 확장시키고 '로타리 평화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했다.
로타리 평화 센터
로타리 회원들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대학교의 설립을 꾸준히 주창했지만, 실현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에 로타리 리더들은 폴 해리스의 50주기를 맞이해 대안적 접근을 생각해냈다.
단순한 아이디어였으나 그 영향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로타리는 평화 구축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사람들에게 석사 과정에 지원하도록 장려하고, 로타리재단은 평화 펠로우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해 기존 대학에 설립된 평화 프로그램에 등록하게 하는 것이었다.
로타리는 1999년 로타리 평화 센터 프로그램의 출범을 승인했고, 첫 번째 로타리 평화 센터가 2002년 연구를 시작했다.
세계 각지의 유수 대학교에 위치한 로타리 평화 센터는 현지 지역사회와 세계무대에서 평화의 촉매가 될 리더들을 양성한다. 이들은 분쟁의 원인을 연구하고, 인권, 국제관계, 세계 보건 및 개방 등의 분야에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혁신적인 방법을 탐구하며 실제적인 기술을 갈고닦는다.
항구적 평화
오늘날 로타리의 목표는 전 세계 지역사회에서 지속 및 측정 가능한 활동을 통해 평화가 구축 및 유지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평화 구축은 인도주의 봉사 단체로서의 로타리의 사명에 영원히 토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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